인류가 생겨나고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고 난 후부터 전쟁은 인류의 생존 방식 중 하나였었다. 앨빈 토플러는 “인류의 역사에서 단 3주만이 전쟁이 없었던 시기였다”라고 단언하기도 했었다. 현재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죽고 죽이는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나 학살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사망자 숫자로 차례로 살펴보도록 해보자.
10위 :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 : 약 1천6백만 명)
1914년 6월에 터진 사라예보 피살 사건으로 유럽 내 복잡한 패권 싸움은 급기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유럽의 어떤 나라도 이 전쟁이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국지전으로 끝날수도 있던 이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갈등으로 인해 전 유럽으로 불길이 번지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전쟁은 근대 기술력이 무기로 변환되었을 때 어떤 악몽을 가져올지를 생생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박격포와 기관총 등의 자동화 무기의 발달은 대량 살상이라는 근대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한 것이다.
민족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아 입대한 유럽의 젊은 병사들에게 전장의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하였다. 비행기와 전차가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절 전투는 참호를 파고 수성전을 펼치는 지리한 공방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참호전은 직접 총에 맞아 죽는 경우보다 질병과 익사 등의 부차적인 원인으로 사망자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지리한 참호전은 전쟁을 오래 기간 지속하게 하였으며 그만큼 사상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 유럽을 휩쓸었던 전쟁의 사상자는 동맹군이 4백만 명에 연합군이 6백만 명 이상이었으며 민간인은 5백만 명 이상이 죽어 나가게 된다. 이 전쟁으로 전 세계 인구의 2% 가까이가 사망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유럽의 귀족 가문 상당수가 대가 끊기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9위 : 티무르의 정복 전쟁 (사망자 : 약 1천7백만 명)
칭기즈칸의 4개 영토 중 하나인 차가타이한국의 부족장 아들로 태어난 티무르는 똑똑하고 냉정한 야심가였었다. 그는 정치적 동지이자 의형제까지 맺었던 후사인과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자마자 그를 암살하고 그의 아내인 사라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 버린다.(인성 터짐)
약한 정통성과 내부 분열을 막기 위해 티무르는 자신의 일평생을 정복 전쟁에 바치게 된다. 그의 정복 전쟁은 30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복지는 중서부 아시아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압도적 위업을 남기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티무르의 점령지는 학살과 약탈이 난무하던 지옥 그 자체였었다.. 월급을 따로 주지 않았던 그의 군대는 정복지의 약탈만이 유일한 수입원이자 즐거움이었다. 항복한 적들은 자비 없이 모두 죽였으며 여자들은 강간하고 살해하였으며 아이들은 말로 밟아 죽였다.
이슬람교도였던 티무르는 성전을 앞세워 전쟁을 했지만 실상은 약탈을 위한 학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패배를 모르던 이 잔혹한 정복자는 명나라 정복을 위한 진군 도중 타지에서 병사하게 되는 것으로 잔혹한 진군을 멈추게 된다.
8위 : 태평천국의 난 (사망자 약 2천만 명)
1850년부터 1864년까지 14년 동안 벌어진 청나라 시대의 내전은 가공할만한 사상자를 내게 된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한족의 불만과 도전이 폭발 직전이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자신을 제2의 예수라고 자칭한 홍수전은 한족의 부활과 평등사상을 내세워 당시 청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중국 토착세력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기독교 평등 국가인 태평천국을 세웠으며 청의 지배와 변발을 거부하며 거병하게 된다.
한때는 중국 남경에 수도를 세워 청나라 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이 부족했던 지도부들의 정치력과 내부 권력 다툼으로 내부적으로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다.
결국 청나라와 영국을 위시한 연합군에 의해 14년간의 항전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에 엄청난 사상자가 났던 건 청나라의 살벌한 보복 정책 때문이었다. 태평천국이 자리 잡았던 지역을 수복한 청군은 그 지역에 있었던 민간인들을 모두 반역의 죄로 극형에 처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증국번이 이끄는 청 정규군에 의한 남경 대학살은 살육극 그 자체였었다.. 남경의 수성을 무너트린 청군은 남경에 있는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역모의 죄로 모두 도륙했던 것이다. 이때 남경의 인구가 100만이었는데 몇 년 후 인구조사에서 5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한마디로 도시 자체를 쓸어 버렸던 것이다. 태평천국 운동 동안 2천만 명이 사망하며 청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방아쇠가 되었다.
8위 : 스탈린의 대학살 (사망자 약 2천만 명)
소비에트 연방의 30년 철권 통치자 스탈린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 인물이다. 열악한 농노 중심 국가였던 러시아를 개조해 중공업 위주의 열강으로 만든 근본을 만든 건 분명한 그의 치적이었다. 이러한 발전은 그 후 미국과 더불어 20세기 양강 체제를 구축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빛에 가려진 그늘은 너무나도 어두운 핏빛 이었 다는 게 문제이다. 독재자였던 그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과도한 중공업 정책으로 인해 농업이 무너진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이 닥쳤을 때 700백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비록 그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과도한 정책의 간접적 결과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레닌 사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능력 있는 군인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그들이 가진 군기술과 정보를 모두 없애 버린다. 자신의 독재 권력에 대항할 싹을 자르기 위해 군의 핵심 인물과 노하우를 과감히 포기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2차 대전 초기 독일에 처참히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몇 백만명의 군인이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스탈린의 숙청 대상이 군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공산당에 대항하는 500만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 나갔으며 강제 해외 이주 정책에 의해 타국민들 170만 명이 죽기도 하였다. 물론 적군에 대한 학살은 당연히 있었으며 독일과 폴란드 내에서의 학살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의 주치의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였을 정도였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했었던 말은 그의 인간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8위 : 인디언 학살 (사망자 약 2천만 명)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본격적인 인디언 학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항해술의 발달로 인한 유럽 열강의 신대륙 진출은 토착 인디언들에게는 재앙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원주민과 상생을 모색했던 남아메리카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으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독립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며 인디언과 이주민들 간의 갈등과 마찰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미국은 인디언이주법을 앞세운 폭력으로 인디언들을 몰아냈으며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게 되며 많은 수의 인디언들이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의 원인으로 인한 사망자 보다 더 심각했던 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이미 면역력을 가지고 있던 서양 이주민들의 바이러스는 천혜의 자연에서 살고 있던 인디언에게는 치명적인 화학 무기였던 셈이다. 더 잔인한 사실은, 이주자들은 전염병 병원에서 나온 이불과 목도리를 인디언들에게 일부러 선물을 했다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에 있었던 2,000만명의 토착민 인구는 인디언 전쟁 후 겨우 몇 십 만명 밖에 안 남게 되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낭만적인 서부 개척사가 누구에게는 잔인한 홀로코스트 그 자체였었다는 것이다. 금전으로 매수하고 사기와 협박으로 도장을 찍게 만들며 총칼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며 빼앗은 아메리칸드림의 현실은 잔인했다.
5위 : 명나라의 멸망 (사망자 약 2천 5백만 명)
명청 교체기 시대에 몇 가지의 큰 내란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된다. 먼저 17세기 초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소빙하기로 인한 대가뭄이었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이상 기온으로 인한 피해는 중국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철저한 농경 사회 중심 국가였던 명나라는 이 대가뭄의 타격으로 국가의 근간이 흔들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명은 임진왜란에 파병을 보냈으며 막강해진 북쪽의 후금에 대한 항전도 동시에 수행해야 할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고는 말라 갔으며 세금을 징수할 농민들은 굶어 죽어 나가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더 강력한 한방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자성의 내란이었다. 농민출신인 이자성은 명나라에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농민들과 유랑민들을 끌어 모아 강력한 쿠데타 세력을 이루게 된다. 특히 이자성은 능력 있는 장수들을 끌어들여 엄격한 군율 아래 확실한 군의 모습까지 갖추게 되며 명을 더욱더 압박하게 된다.
그들은 화북 지방을 평정하고 서안을 점령하며 이자성은 왕으로 추대한다. 그 후 결국 자금성까지 함락시키고 승정제는 자결함으로써 명을 무너트리고 황제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이자성과 반란군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청나라와 맞서고 있었던 명나라의 명장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하고 그 칼끝을 이자성에게 돌렸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오삼계가 이끄는 최정예 군과 뛰어난 기병술을 자랑하는 청나라의 군대는 질과 양적인 부분에서 이자성의 군대를 압도했었던 것이다. 결국 후금과 명나라 오삼계 장군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에서 쫓겨나게 되며 황제의 삶을 40일로 마감하게 된다
4위 : 안사의 난 (사망자 약 3천6백만 명)
안사의 난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산과 그의 부하인 사사명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강북에 군사적 실세였던 안록산은 양귀비의 사촌오빠였던 궁중 실세 양국충과의 갈등이 폭발하며 내란이 시작된다. 안록산은 그 당시 당나라 3분의 1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며 이민족 용병까지 거닐고 있었던 군실세였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안록산의 도전에 당나라는 겨우 겨우 막아 내는 형국으로 흘러가게 되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결국 1년 만에 안록산은 장안을 정복하고 양국충을 처형 시키며 양귀비는 자결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안록산은 권력다툼에 밀려난 자신의 친아들인 안경서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안록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이 안경서를 제거하며 수괴로 올라섰으나 그 또한 그의 친아들인 사조의에게 제거를 당한다. 2년 후 사조의가 자결을 하며 난은 끝나게 되었으나 그 후 2번의 전란과 2번의 역모사건으로 당나라는 망국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10년간의 내란으로 당시 전국의 인구는 5천2백만 명에서 1천 6백만 명으로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되며 인류 역사상 인구 대비 사망률 1위라는 오명을 갖게 된다.
3위 :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사망자 약 4천만 명)
중국을 개창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여러모로 닮아 있는 인물이다. 조국을 천하통일한 구국의 영웅인 동시에 많은 자국민들을 죽게 만든 학살자라는 부분에서 말이다. 천재적인 게릴라 전술로 장개석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통일한 마오쩌둥이었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가로써는 최악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문화혁명과 대약진 운동으로 상징되는 비극은 중국의 역사를 20년 뒤로 돌리는 최악의 통치이자 자국민 학살극이었다. 대약진운동은 스탈린의 중공화 정책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의 회심의 국가개발 정책이었다. 7년 안에 영국을 올라서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 다는 원대한 목표는 결국 자국민을 지옥으로 밀어 넣게 된다.
제대로 된 장기 정책이나 분석 없이 결과물만 뽑아내야 하는 성과주의 개발정책이 성공할 리 만무했던 것이다.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표방한 농업집단화는 농업 중심국가의 기본을 무너트리며 전 인민의 기본 주식 체계가 무너지게 만들었다. 소련에서 이미 실패한 이 몽상가적 이론은 크나큰 생채기만 남긴 채 흐지부지 끝났던 것이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마오쩌둥의 이 유명한 말로 알려진 제사해운동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농사에 해가 된다는 참새, 쥐, 모기, 파리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이 운동은 공산당원은 물론 일반 국민까지 총동원령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해로운 병충해를 잡아먹던 참새의 씨가 마르며 농업진단화로 어려워진 농촌에 재앙이 닥치게 된다. 3년 동안 인재에 가까운 대기근으로 최소 4천만명이 죽었다는 것이 정설로 남아 있다
또한 공산당은 이 대약진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인민들을 때려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게 된다. 그 대상은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도 포함돼 있었으며 그들의 살인은 당연시되었다. 1960년 후난성의 인구 10%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노인이 천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할 정도였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을 바라보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명언이 있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굶어 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는가? "
3위 : 칭기즈칸의 정복전쟁 (사망자 약 4천만 명)
12세기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진 군주국이었으며 그 기록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말밥굽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부터 일본의 후쿠오카까지 짓밟았으며 오늘날까지 몽골리안이 아시아인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굳히게 할 만큼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1,00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럽과 중동에서 칭기즈칸은 야만인이자 학살자로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걸 보면 그들의 위상이 어떤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200만명도 안 되는 소국이었지만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유린하였다. 유목민족이었던 그들은 뛰어난 기마술을 바탕으로 한 궁술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달리는 말에서도 활을 쏠 수 있었으며 유럽의 활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바탕으로 개활지에서 그들을 당해낼 군대는 없었던 것이다.
몽골군 1사람당 2마리의 말을 갈아타며 긴 원정거리의 기동성을 살려 냈으며 정찰병보다 적진에 먼저 도착할 정도의 압도적인 속도전을 펼쳤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정보전과 심리전에 뛰어났다. 적국에 미리 유언비어로 공포심을 심는 것이 그들의 주 전략이었다.
실제 몽골군은 항전하는 적은 무자비하게 멸족을 시켰지만 항복을 하는 적에게는 관대함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몽골에 끝까지 항전을 했었던 중동 지방의 최강자 호라즘 왕국은 나라 자체를 멸망시켰으며 서하국은 모든 주민들을 살해해 아예 멸족시켜 버렸다.
그들의 극악무도했던 정복전쟁으로 4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일각에서는 그들이 흑사병을 전 세계에 퍼트려 1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며 주장하기도 한다
1위: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약 7천만 명)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에 추축국이 일으키고 이에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5년까지 이어진 범세계적 전쟁이었으며 현재까지 인류사 최악의 전쟁이자 최대의 전쟁으로 평가된다.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세계 패권의 중심이 서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간 계기이기도 하다.
특히 인류사에 핵폭탄이 사용된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나라는 소련으로 공식적으로만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800만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공식 집계되지 않은 사망자를 포함하면 2500만에 달한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한편 폴란드는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 500만의 사망자를 냈으며, 중국은 공식적으로 131만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1천만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 이유는 추측국들의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 때문이었다. 과도한 팽창주의와 파시즘 이데올로기로 인해 군인들에 대한 피해보다 민간인에 대한 피해가 더 컸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특정 종족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공언하며 이를 국가 주도하에 실행한 사례는, 적어도 근대 이후에는 나치 독일이 유일하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서 약 4~5백만여 명을 죽였으며 홀로코스트로 6백만여 명의 유대인을 처형시켰다.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 등지에서 1천5백만이 넘는 적국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일본 제국 역시 중화민국에서 약 8백만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였으며, 동남아 전역에서도 4백만여 명의 피해자를 낳았다. 이러한 피해는 비단 연합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전쟁 말기 소련이 독일, 헝가리 등 추축국의 본토로 진입하면서 벌인 집단 강간 및 학살극이 있었다. 약 2백만여 명의 독일 민간인을 포함하여 수십만의 추축국 민간인들이 소련군의 보복에 의해 사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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