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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

영국 여왕, 스코틀랜드 여왕을 죽이다

프랑스 왕비이자 스코틀랜드 여왕

1558424일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에서는 유럽 최고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 화려한 결혼식의 주인공은 프랑스 왕위 계승자였던 프랑수아 2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이었다. 이 결혼으로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왕비이자 프랑스 왕비라는 2개의 왕관을 손에 거머 주게 된다.

메리 스튜어트 여왕

180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빼어난 용모, 그리고 6개 국어에 능통하며 승마, 음악, 춤까지 섭렵한 재원이기도 했다. 그녀는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셀럽 중에 셀럽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왜 목이 잘려나가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종교와의 전쟁

비극의 시작은 그녀의 첫 남편이었던 프랑수아 2세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척추병과 유전병으로 온전치 않던 프랑수아 2세의 요절은 어찌 보면 예정된 운명이었다. 남편 사망 후 프랑스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고국으로의 귀환이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 시절 스코틀랜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극심한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히던 시절로 가톨릭 신자였던 여왕의 귀환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온실 속에 화초처럼 자란 메리 여왕이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갈 정치력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왕비로 있었던 동안 스코틀랜드의 정권을 잡았던 것은 그의 이복 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경 이었다. 같은 아버지의 핏줄이었지만 개신교를 믿는 모레이경과 가톨릭교를 믿는 메리 여왕의 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제임스 모레이

이런 가운데 그녀의 두 번째 결혼 상대를 정하는 과정에서 두 이복 남매의 갈등은 터지고 만다. 메리 여왕은 모레이 경과 개신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톨릭교도였던 단리 경과의 결혼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정권을 잡고 있던 개신교에 맞서기 위한 메리의 선택에 모레이 경은 큰 배신감과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둘의 결혼식이 있던 날 모레이경은 반란을 일으킨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군사적 도움까지 받으며 호기롭게 일으킨 반란은 메리 여왕의 정규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모레이 경은 목숨만 부지한 채 잉글랜드로 도피하게 되고 메리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진정한 정권을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거기 까지였다. 결혼 후 남편이었던 단리 경의 숨겨 왔던 야망이 꿈틀대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혼 직후 단리 경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며 스코틀랜드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러한 단리 경의 행동에 적잖은 충격과 배신감으로 메리 여왕의 마음은 그에게서 멀어져 가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의 사이를 완전히 금이 가게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메리 여왕의 깊은 총애를 받았던 내무 대신 데이비드 리치오였다. 단리 경은 이 둘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의심하게 되고 이 때 임신한 메리의 태아가 본인의 아이가 아닐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급기야 단리 경은 모레이의 반란 실패 후 숨을 죽이고 있던 개신교와 손을 잡게 된다

156639일 단리와 개신교는 반란을 일으킨다. 메리 여왕이 보는 앞에서 리치오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녀를 감금시켜 버린 것이다. 메리 여왕은 감금생활 3개월 후 훗날 영국 통합 왕이 될 제임스 6세를 출산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의 틈을 타 잉글랜드로 도망쳤던 이복오빠 모레이 경 역시 귀환한다

리치오를 살해하는 단리

두 번의 사별과 세 번의 결혼

개신교와 모레이 경의 스코틀랜드 재탈환 이후 불행했던 여왕으로써 삶에 더욱 더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단리 경의 반란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단리 경이 석연치 않은 폭발 사고로 의문사를 당하게 된 것이다.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건 그녀의 새로운 연인 보스웰 경이었다. 남편인 단리 경과 달리 남성적 기개를 가지고 있던 보스웰 경은 정치적으로 무력했던 메리 여왕에게 빛이 되어 주었던 존재였었다. 단리 살인사건의 재판에 회부 되지만 무죄로 풀려난 보스웰 경은 석방 후 곧바로 메리 여왕과 세 번째 결혼을 비밀스럽게 올리게 된다. 보스웰 경이 자신의 전처와 이혼한 지 불과 14일만에 이루어진 전격적으로 결혼식이었다.

보스웰

하지만 석연치 않은 메리 여왕의 결혼에 개신교는 물론 그녀를 지지해주던 가톨릭교마저 크게 반발하게 된다. 메리 여왕으로써 대중의 외면과 정치적 정당성까지 모두 잃게 되는 자충수를 두었던 셈이다. 결국 26명의 귀족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되고 그녀는 속절없이 잉글랜드로 추방되듯 도망치게 된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다

16세기 영국에는 메리 여왕 말고 1명의 여왕이 또 있었다. 바로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였었다.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 헨리 7세의 증손녀로써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었고, 여섯 살 되던 해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되었으며, 열일곱 살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

황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메리 여왕이었지만 그에 반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피 묻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게 된다. 그 이유는 아내와 딸에게 냉혹했던 아버지 헨리 8세 때문이었다. 평범한 귀족 출신이었던 어머니 앤 볼린은 헨리8세와 결혼 후 아들을 못 낳는다. 아들을 못 낳는 앤 볼린에 큰 실망감과 싫증을 느끼던 헨리 8세는 신하들의 정치적 꼬임에 넘어가 결혼 무효를 선언하고 그녀를 참수형에 처한다.

영화 천일의스캔들 속 앤볼린의 처형식

헨리8세 사후 왕위에 오른 이복언니를 피해 시골로 도망친 후 죽은 듯이 지내게 된다. 그 후 몇 년 후 이복언니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초야에 묻혀 있던 엘리자베스가 전격적으로 여왕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여왕이 되면 사라질 줄 알았던 위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의 존재 때문이었다. 카톡릭 교단은 엘리자베스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그녀가 아닌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의 적통의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서자라는 헨리 8세의 공식적인 선언이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던져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란에 기름을 부은 건 메리 여왕의 도발도 크게 한몫 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 문장에 잉글랜드 왕관을 덧붙인 인장을 사용하였다.. 공식 외교 문서에는 프랑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이라고 서명함으로써 잉글랜드의 통치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메리 여왕의 문장들

엘리자베스 입장에서는 눈이 뒤집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실제 어머니인 앤 볼린은 교회에서 인정한 정실부인이었으며 잉글랜드의 적통 왕이라는 에든버러 조약서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조약서에 메리 여왕은 사인하기를 거부를 하며 둘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날개 잃은 퀸의 추락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둘의 정치적 위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한 명의 퀸은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으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추락하게 된다. 또 다른 퀸은 독신주의자를 표방하며 자신만의 왕국을 공고히 다지게 된다. 귀족들에게 쫓겨난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로 피신하며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메리 여왕은 그때까지도 그렇게 순진했던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시골 변두리에 메리 여왕을 18년 동안 강제 감금시켜 버린다.

항변하는 메리

그 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내전으로 혼란한 틈을 타 메리 여왕에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 씌워 버린다. 아무리 위상이 떨어졌다 해도 메리는 프랑스의 왕비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내전을 틈 타 그들의 숙원인 메리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메리 여왕은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지만 그녀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재판장에서 그녀는 적국과 내통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158728일 메리 여왕은 36명의 잉글랜드 궁정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 당한다. 세상 부러울 것 없었던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퀸은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메리의 처형식

퀸은 죽지만 죽지 않는다

평생 독신주의를 선언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당연히 후사가 없었다. 대영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그녀였지만 후사를 결정해야 할 시기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5촌 조카이자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6세를 지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왕으로 내세울 혈육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임스 1세

1603324일 제임스 6세는 최초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군주인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토록 메리 여왕이 원하던 통합 군주의 꿈을 아들이 이룬 것이다. 1살 때 생이별한 두 모자의 상봉은 웨스트민스턴 공동묘지에 메리의 시신을 이장함으로써 500년 만에 이루어지게 된다.

메리 여왕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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